맛집 이야기

극치의 지식을 얻는 도를 말하다

장생불사 2020. 2. 25. 21:03

지극한 지식을 얻는 도를 말하다

 

유학의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에 하나인 <대학(大學)>의 첫머리에는 큰 공부를 하는 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큰 공부를 하는 길은 큰 사람이 되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인의 길은 군자(君子)가 가는 길이다. 군은 임금 군()이다.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일러 군자라고 한다. 대인의 길은 군사부(君師父)의 길이다. 군사부란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大學之道在明 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더욱 밝게 하고 백성들을 친하게 대하며 지극한 선()에 머무르게 하는 것에 있다.

 

 

이 글을 읽을 때 대학지도(大學之道)는 재명명덕(在明明德)하며 재신민(在新民)하며재친민(在親民)’재신민(在新民)’으로 바꾸어 읽는 사람들이 많은데 주자(朱子)가 재신민(在新民)으로 바꾸어 읽게 한 것이다. 주자는 친할 친()을 새로울 신()으로 풀이하였다. 백성을 친하게 하며백성을 새롭게 하며로 풀이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풀이라고 할 수 없다. 백성들을 친자식이나 친부모 같이 여긴다는 말은 있을 수 있지만 백성들을 신자식이나 신부모 같이 여긴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재명명덕(在明明德)’을 모든 사람들이 재명명덕(在明明德)하며로 붙여서 읽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잘못 읽는 것이다.‘재명(在明), 명덕(名德)하며로 뛰어서 읽는 것이 바르게 읽는 것이다. 어떤 글이든지 글자 사이를 어떻게 띄워서 읽는지 어떻게 붙여서 읽는지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재명명덕을 붙여서 읽으면 덕을 밝히고 밝히는 것에 있다로 새기는 것이 되어 밝히고 밝히는 것으로 밝히는 것을 두 번 강조하는 의미가 된다. 곧 밝을 명자가 두 개를 겹쳐서 강조하는 뜻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재명(在明), 명덕(明德)하며로 띄워서 읽으면 이미 갖고 있는 밝은 덕을 더욱 더 밝히는 데 있다로 새기는 것이 되어 전혀 다른 풀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재명명덕을 붙여서 읽지 않고 띄워서 읽는 것이 옳은가? 사람은 같은 글을 읽어도 아는 만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아는 대로 새길 수밖에 없다.

 

 

대학의 이 부분을 읽고 풀이하는 것에 대하여 스승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옛날 어려서 서당에서 대학을 읽을 적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재명명덕하며로 붙여서 읽었으나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읽는 것과는 상관없이 재명, 명덕하며로 띄어서 읽었다. 스승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따지셨다.

 

너는 왜 재명명덕을 붙여서 읽지 않고 띄워서 읽느냐?”

 

사람은 누구든지 아는 대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제가 알고 이해한 대로 읽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부분을 붙여서 읽는데 다른 사람들이 읽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지요. 다 모자라서 그렇게 읽는 것입니다. 모자라는 이들은 모두 그렇게 읽습니다.”

 

네 이놈! 어째서 그렇게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바로 밝혀 보아라. 만약 합당하게 설명하지 못하면 네 종아리가 성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네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매를 30대 맞겠습니다.”

 

좋다. 네가 합당하게 설명을 하지 못하면 종아리를 30대를 때릴 것이다.”

 

 

 

이것을 보고 주변에 있는 같이 공부하는 아이들이 모두 비웃었다. 오늘 저 놈이 스승님한테 매를 실컷 맞을 것이라고 하면서 쑥덕거렸다.

 

그래 네가 그렇게 읽은 이유를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느냐?”

 

네 있습니다.”

 

30대를 안 맞을 자신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그럼 어디 말해 보아라.”

 

여기서 명명덕을 붙여서 읽으면 큰 공부를 하는 길은 덕을 밝히고 밝히는 것에 있다로 새기게 됩니다. 명명덕을 붙여서 읽으면 덕을 밝히는 것이 무엇인지 왜 덕을 밝혀야 하는지를 두 번 반복해서 썼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재명, 명덕으로 띄워서 읽으면 이미 밝혀진 덕을 밝히는 데 있다로 새기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미 밝혀진 덕이 무엇이겠습니까? 밝혀진 덕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타고난 밝음 곧 타고난 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날 때부터 아는 것이 곧 밝혀진 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배고프면 젖을 달라고 울고 똥이나 오줌을 싸면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울고 혼자 있으면 업어 달라거나 안아달라고 하여 울지 않습니까? 이처럼 스스로 어려서부터 공부하려고 하고 익히려고 하는 것이나 태어날 때부터 알려고 하는 것, 또는 날 때부터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일러서 이미 있는 밝음 곧 재명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이미 있는 밝은 것을 더 밝게 밝히는 것에 있다고 풀이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그 부분을 띄워서 읽은 것입니다.”

 

옳다. 네 말이 과연 그럴 듯하구나.”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말하는 것, 먹는 것, 걷는 것, 기는 것 등 모든 타고난 덕과 성품을 가꾸어 주는 것이 명덕(明德)이다. ()을 더욱 후덕(厚德)하게 해 주는 것, 아는 것을 더 깊이 잘 알게 하는 것, 내가 나한테 후덕하듯이 남한테도 후덕하게 하는 것, 나를 대하듯 남한테도 후덕하게 대하는 것이 명덕인 것이다.

주자는 신민(新民)이라고 고쳐 썼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본래대로 친민(親民)으로 읽어야 한다. 백성들을 새롭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대하듯이 하고 자신을 대하듯이 하며 부모를 대하듯이 하면 백성들이 감복(感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민(親民)이 옳고 신민(新民)은 틀린 것이다. 신민(新民)은 백성들한테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친제자(親弟子), 친자녀(親子女), 친부모(親父母)라고 부르는 것이지 신자녀(新子女), 신제자(新子女) 신부모(新父母)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묵은 자녀, 묵은 부모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명명덕이라면 가장 밝고 밝은 덕이 무엇인가. 밝은 덕은 지혜를 얻어야 가능한 것이다. 지혜를 얻은 이는 성현이 되게 가르치는 것이다. 지극한 선에 머물러야 탈선하지 않는다.

 

知止而后有定이니 安而后能靜하며 靜而后能安하며 安而后能慮하며 慮而后能得이니라.

 

지극한 지식에 그치는 것을 안 이후에 뜻을 정하고 안정을 찾을 수 있고 편안해져야 고요해지고 고요한 뒤에 편안할 수 있고 편안한 뒤에야 능히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

 

 

여기서는 도()를 얻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物有本末하고 事有終始하니 知所先後則近道矣리라.

 

물건에는 근본과 갈래가 있고 뿌리와 가지가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며 무엇이 먼저이고 나중인지를 알면 도에 가깝다.

 

여기에서는 삼단논법(三段論法)으로 도에 이르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글은 공자(孔子)가 지은 것이 아니고 그 훨씬 오래 전인 복희씨(伏羲氏) 시대 때부터 구전(口傳)인 문언(文言)으로 전해 오는 것을 공자가 추려서 넣은 것이다. 곧 공자가 있기 수천 년 전부터 전해 오는 말을 공자가 편집하여 넣은 것이다.

지소선후(知所先後)면 즉근도의(則近道矣)’는 무엇이 먼저이고 나중인지 알면 도()에 가깝다는 뜻이다.

선천(先天)이나 후천(後天)이라고 하는 말은 모두 복희씨(伏羲氏)가 처음 한 말이다. 이 말 역시 오래 전부터 전해 오던 말인데 공자는 선천(先天)이 무엇이고 후천(後天)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이 선천인지 후천인지를 알면 도에 가까이 이를 수 있는데 공자는 그것을 거꾸로 이해하고 그것이 옳은 줄 알고 있었다.

 

 

지금도 앞으로 후천개벽이 온다거나 후천개벽 5만 년이 열린다는 식으로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옛날 달력을 갖다 놓고 앞날에 올 것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는 지난날 후()이고 선()은 앞날 선()이다. 지나간 과거를 후천(後天)이라고 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세계를 선천(先天)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자는 본디 우리 옛날 민족이 만든 글자다. 옛 한문을 보면 우리말과 어순(語順)이 거의 같다. 그런데 페르시아에서 망명하여 온 이민족의 자손인 주나라 문왕(文王)이 한문의 어순을 서양식으로 거꾸로 바꾸어 버렸다. 우리말이 중국으로 가서 선후(先後)가 거꾸로 바뀌어버렸다. 앞날 선() 자가 먼저 선() 자로 뜻이 반대로 바뀌어져 버린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參羅萬像)의 도는 360도로 퍼져 나가게 되어 있다. 태양을 중심으로 빗살처럼 퍼져 나가는 것이다. 퍼져 나가다가 다시 가지를 쳐서 360도로 퍼져 나가니 360도 곱하기 360도는 1296백이 되는 것이다. 129,600은 만물의 수를 의미한다. 만물이 살아가는 길이 각기 다른데 이 모두를 일러서 도()라고 하는 것이다. 도는 건곤(乾坤)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만든 것이다.

복희씨(伏羲氏)가 만든 역()을 주나라 문왕과 강태공이 국가를 찬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면서 이름이 주역(周易)으로 바뀌었고 그 내용과 순서를 뒤바꾸어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 선지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큰 일은 일그러져 있는 주역(周易)을 바로잡는 일이다.

천하 만물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 바로 갈 수 있도록 그 궤도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는 잘못된 지도를 바로잡아서 바른 길로 안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일은 먼저 그 길을 가 본 사람 그 길을 확연하게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만물이 생겨나고 가는 길을 알면 그 원인과 인연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말이 서쪽 중국으로 가서 어순이 영어와 같이 바뀌어졌다. 주역에 있는 모든 글은 모두 영어의 어순과 같이 바꾸어 버렸다. 이는 페르시아에서 귀화한 이민족의 자손인 문왕(文王)과 강태공(姜太公)이 바꾼 것이다. 앞을 뒤라고 부르고 뒤를 앞이라고 하게 부르게 것이다. 앞날 선()이 지난날 선()이 되어버린 것이다. 뒷날 후()가 앞날 후가 되었다. 그래서 후손(後孫)이니 후일(後日)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나 후손(後孫) 대신 선손(先孫)이라고 해야 맞고 선조(先朝) 대신 후조(後祖)라고 해야 맞는 말이며 내일(來日) 곧 후일(後日)을 선일(先日)이라고 해야 맞는 말인 것이다.

공자(孔子)는 선천팔괘(先天八卦)는 복희(伏羲)씨가 지은 것이고 후천팔괘(後天八卦)는 문왕(文王)이 지은 것으로 여겼다. 선천(先天)이란 말을 먼저 선()으로 이해한 것이다.

 

 

선지자(先知者)란 어떤 사람인가? 앞날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사람이 선지자가 아닌가? 공자는 앞날 선()을 지난 날 선()으로 잘못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복희씨가 더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이므로 복희 8괘를 선천 8괘라고 보았고 문왕은 그 뒤에 살았던 사람이므로 문왕 팔괘를 후천 8괘라고 본 것이다. 선천팔괘나 후천팔괘를 임의로 구분한 것도 공자가 한 일이다.

복희씨의 선천팔괘도(先天八卦圖)를 살펴보면 모든 괘가 정확하게 짝이 잘 맞게 되어 있다. 곧 짝이 잘 맞는 것이다. 문왕의 후천팔괘도(後天八卦圖)를 보면 짝이 맞지 않고 서로 일그러져 엇갈려 있다.

공자는 선천 팔괘는 지나간 세상을 나타낸 것이고 후천팔괘를 앞으로 올 세상을 나타낸 것이라고 착각하였다. 앞뒤를 착각하고 있으므로 서울로 갈 것을 부산으로 가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가면 바른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도에서 벗어난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의주로 가야 할 것을 부산으로 가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으면 영원히 의주로 갈 수 없다. 틀린 길로 가면 영원히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공자 뒤로 25백 년 동안 이를 바로 알고 공자가 잘못 이해한 것을 지적한 사람은 노자(老子) 말고 아무도 없었다. 복희씨(伏羲氏) 뒤로 공자가 가장 큰 이름을 얻었으나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공자를 성인으로 알고 떠받들기만 했지 감히 공자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도 없고 알려고 한 사람도 없으며 공자를 비판한 사람도 없었다.

 

 

古之-欲 明 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하고 欲治其國者先齊其家하고 欲齊其家者先修其身하고 欲修其身者先正其心하고 欲正其心者先誠其意하고 欲誠其意者先致其知하니 致知在格物이니라.

 

옛적에 밝혀진 덕()을 더욱 밝히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하게 해야 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몸을 닦아야 하고 몸을 닦으려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

사람의 병을 고쳐 주고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은 참된 의사라고 할 수 없다. 학생들을 가르쳐서 곧 남을 가르쳐서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은 참된 선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신부나 목사, 승려 같은 성직자들은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 종교의 지도자들도 그 직책이 생계를 위한 직업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승려들은 불전(佛錢)이 안 들어오는 절에는 하루도 머물지 않는다. 월급 한 푼도 안 준다면 목사나 신부 노릇을 하려는 사람도 없다. 생업(生業)의 도구나 수입을 얻기 위해서 일을 한다면 마음이 바르지 않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이득을 바라고 일을 하는 것은 마음이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마음이 순수하지 않은 사람이 성직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뜻이 정성스러워야 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면 그 지식이 극치에 이르러야 한다. 곧 최고의 지식에 다다라야 한다. 그런데 그 최고의 지식은 격물(格物) 곧 물건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에 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곧 사물의 성격을 연구하여 완전한 지식을 얻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

특히 의학(醫學)을 하는 사람들한테 격물치지가 매우 중요하다. 의사는 물건의 성격 곧 환자의 병이 어디서 왔는지 질병의 성격과 특징을 완전히 알고 약을 써야 병을 고칠 수가 있다. 의원은 제일 먼저 격물(格物)을 해야 한다.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는 격물치지에 있다는 것을 대학(大學) 1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왜 세상에 이 물건들이 나왔고 그 물건을 움직이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만물을 다스릴 수 있고 만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격물(格物)이야말로 최고의 과학이다. 미신(迷信)이나 부적(符籍) 같은 것에 의존하고 귀신한테 빌고 부처님이나 예수님한테 비는 것은 격물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물질세상이나 정신세상이나 상관없이 모두 그것을 움직이는 이치가 있기 마련이고 그 이치를 아는 것이 격물이다.

사람의 몸에 병이 나면 소금이 들어가야 병이 낫는다. 왜 소금으로 병이 낫는지 그 이치를 아는 것이 격물이다. 소금이 왜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격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육신의 꼽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꼽추가 있고 육신의 소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소경이 있는 것이다. 물질을 움직이는 것은 정신이다. 귀신은 정신만 있고 물질은 없는 몸이다.

육신이 없는 정신이 곧 귀신이다. 그래서 귀신이 되는 것이 싫어서 귀신이라는 말 귀신 신()자를 나는 쓰지 않는다. 신기(神奇)하다는 말에 귀신 신자 대신에 새 신자를 써서 신기(新奇)하다고 말 한다.

 

 

나는 몸에 열이 많이 나서 물을 자주 마신다. 소변을 볼 때 혈압이 떨어져서 가끔 아찔하여 혈압이 떨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물을 많이 마신다.

그러나 귀신은 물을 마실 수 없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가 없다. 귀신은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가 없고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실 수가 없으며 아무리 추워도 옷을 입을 수가 없다.

귀신은 사람이 몸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귀신은 매우 비참한 존재이다. 그래서 육신이 있는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서 몸을 차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육신 속에 들어가서 그 몸의 정신을 쫓아내고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운전수가 졸고 있을 때 운전대를 귀신한테 맡기는 것과 같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병이 많지 않았다. 옛날 명의들은 90살을 넘게 살면서 일생동안 환자를 치료하였지만 그 동안 겪은 질병의 종류는 60가지를 넘지 않았다.

옛날에는 중국, 일본, 태국, 베트남 같은 동남아 일대의 나라들을 모두 합쳐서 질병의 종류가 모두 81가지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2년 전에 삼성의료원에 근무하는 한 의사가 와서 말하기를 해마다 4천 가지나 되는 병이 새로 생겨나서 불안해서 못 살겠다고 하였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수십 가지 질병이 새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현재 세상에는 46천 이상의 질병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스승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의사로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우리 세대까지는 몇 천 년 전부터 알려져 있는 질병 60가지를 고칠 수 있으면 명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네가 살아야 세상에는 1296백 가지나 되는 새로운 질병이 생겨날 것이다. 그 많은 질병들을 어떻게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며 고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없었던 알 수 없는 새로운 병이 생기면 그 조짐만 보고도 즉시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스승님한테서 무슨 일이거나 문제가 닥쳐도 1초 안에 답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아는 훈련을 받았다. 위급한 병이 생겨서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 생각하고 연구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즉시 답을 알지 않으면 목숨을 구할 수가 없다.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1초 안에 알아내야 아는 것이다. 어떤 환자가 오든지 1초 안에 고칠 수 있는 처방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문제에 대한 답을 즉시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뇌를 훈련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뇌가 그렇게 되도록 뇌를 훈련하고 가르쳐야 한다. 무엇보다도 창의력을 길러야 한다. 한 번도 보고 듣지 못한 것을 알아야 하고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안경, 보청기, 인공치아 같은 것들이 창의력의 산물이다.

에이즈가 나타난 지 30여 년이 지났으나 현대의학에서는 아직 치료방법이 없다. 그러나 나한테 에이즈를 고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지금까지 에이즈 환자 수십 명을 고쳐 주었는데 그 사람들은 한 번 고쳐 주고 나면 전화번호도 바꾸고 인연을 끊어버린다.

 

 

지금은 질병이 발달하는 속도가 인간이 대응하는 능력보다 열 배 이상 빨라서 현대 의학으로 질병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래서 스승님께서 뇌를 빨리 회전시킬 수 있도록 연구한 것이 질문을 통한 교육이다. 스승님은 질문을 통해 가르치셨다. 스승님은 1296백가지 질문을 미리 마련해 두시고 그 질문을 하나씩 하는 방법으로 사람을 가르치셨다.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만 골라서 질문하셨고 그 질문에 즉시 대답을 해야 했다.

풀과 나무는 모든 생명을 대표한다. 풀이나 나무는 각기 그 성질과 특징이 다르다. 풀과 나무가 나서 죽어 썩으면서 효소가 생기고, 부패균이 생겨나서 분해하면 온갖 벌레들이 그것을 먹고 산다. 그 벌레들을 동물이나 새들이 잡아먹고 산다. 그 열매는 쥐나 다람쥐가 먹고 사는 것이다. 청설모는 주로 잣을 먹고 산다. 잣나무가 없는데 청설모가 먼저 나타날 수 있겠는가? 봄이 되면 아무것도 없는 대지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이런 것들을 잘 살펴서 물건의 성격과 이치를 따져서 지식을 얻는 것을 격물치지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잡을 격()은 나무 목()에 각각 각()을 붙여 만든 글자다. 풀과 나무 목()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대표한다. 각각 각()을 붙인 것은 모든 것은 성격이 각기 다르다는 뜻이다. 이 각기 다른 물건들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격물(格物)이다. 물건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을 지식의 극치로 삼는 것을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한다.

바늘만으로 옷을 꿰매거나 실만으로 옷을 꿰맬 수 없다. 실이 있어도 바늘이 없으면 옷을 꿰맬 수 없고 바늘이 있어도 실이 없으면 옷을 꿰맬 수 없다. 격물치지는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이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실마리를 찾아야 엉킨 실타리를 풀 수 있다. 책에서 읽은 것이나 남한테 들은 지식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